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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낙태

기사입력 2020.10.28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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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광교 원장(노사법률원)

     

    고려사절요에 낙태에 대한 참혹한 기록이 있다.

    “검교시중 권고가 죽었는데 생전에 그가 어찌나 탐욕하고 잔인한지 땅 문제로 아들과 싸우다가 만삭인 며느리를 발로 차 낙태시켜버렸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낙태라는 단어가 27회에 거쳐 기록되어 있는데 태종 때 벌어진 사건으로 “강희중의 처가 임신하였는데 양홍달이 배 한가운데에 덩어리가 생겼다며 뜸을 떠서 낙태시켰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아들이었다.”라는 대목이 있다.

    남편이 배 아프다는 아내를 데리고 의관을 찾아갔더니 임신인 줄 모르고 배 안에 혹이 있다며 오진으로 낙태를 시킨 것이다.

    세종 때에는 낙태시킨 자들에 대한 처벌기록이 있다.

    “형조 관리가 폭행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백정 박문의 아내 웅덕을 발로 차서 낙태시켰으니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재가를 구하는 대목이 있고,

    “지양근군사 이종직이 임산부를 구타하여 낙태시켰으니 장 백대와 함께 자자(刺字 : 얼굴이나 팔뚝의 살을 따고 홈을 내어 먹물로 죄명을 찍어 넣던 벌)에 처한다.”는 기록이 있다.

    영조 때에는 장령 권현이 “공홍감사 이보혁이 어떤 죄 때문인지 모르지만 임산부에게 장형을 가하여 쌍태아를 낙태로 죽게 하였으니 이는 한꺼번에 세 명을 죽인 것과 같다.”라며 중히 문책할 것을 상소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같은 기록들을 미루어 보건대 임산부를 구타해서 낙태시키면 장 1백대, 낙태시키고 사망하게 한 자는 교형, 심문하다가 낙태시키면 파직 발령하는 수준으로 처벌하였던 것 같다.

    하지만 역사서에는 낙태 당한 여성들의 모습만 있을 뿐, 자낙태 즉 스스로 낙태한 것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이는 낙태라는 은밀하고 개인적인 사안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이는데, 고종 대에 이르러 “부녀자가 독약을 마시고 낙태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명령이 비로소 내려지는바 아마 당시에도 낙태가 횡횡했던 모양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 낙태에 관한 법 개정을 둘러싸고 이런저런 논란이 많다.

    생각해보면 낙태의 시작부터 끝까지 그 고통은 오롯이 여성의 몫이지 않던가!

    살피건대 국회 입법 활동이나 정부 정책의 패러다임이 그동안의 ‘처벌’ 중심에서 벗어나 이제는 ‘지원’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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